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2차 직봉전쟁 (문단 편집) == 배경 == [[1차 직봉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직계는 대총통 [[쉬스창]]이 정통성이 없는 대총통이라고 공격하여 법통중광의 구호를 내걸고 1917년 [[장훈복벽]]으로 해산된 구 국회와 약법 체제를 부활, [[쉬스창]]을 압박하여 하야시켰으며 2대 대총통 [[리위안훙]]을 총통으로 추대했다. 직계군벌의 수령 차오쿤은 헌법 제정과 총통 선거를 통해 자신이 총통이 됨으로 베이징 정부의 합법성과 정통성, 권위를 회복시켜 이를 바탕으로 중국을 통일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우페이푸는 대국을 안정시킨 후에 차오쿤이 총통이 되는 편이 낫다고 여겼는데 결국 직계군벌은 리위안훙 총통을 핍박하여 하야시키고 1923년 10월 [[회선 사건]]을 통해 차오쿤을 대총통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절강독군 [[루융샹]] 등이 중앙과 단절을 선언하였고 [[천중밍]]을 몰아내고 다시 남방에서 정부를 수립한 [[쑨원]]의 [[중국 국민당]], 북방의 봉천군벌과 연계하여 직계에 대항하려 했다. 총통 선출을 통해 중앙의 권위를 회복하려 했던 차오쿤의 구상과는 달리 회선은 중앙의 정통성을 결정적으로 부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직계군벌 내부에서는 1차 직봉전쟁 때 군공을 세운 펑위샹, 왕승빈 등이 우페이푸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장쭤린과 접촉하고 있었다. 장쭤린이 루융샹, 쑨원 등 막강한 반직 세력들을 포섭한 데에 반해 1924년 시점에서 직계군벌은 기껏해야 산동독군 정사기와 좀 친한 정도였고 반면 1차 직봉전쟁 때 직계의 편이었던 하남, 열하의 세력이 이탈하여 봉천에 기울고 있었다. 거기에 우페이푸와 소요남이 재정 궁핍으로 인하여 마찰을 빚고 있었으며 사천, 호남, 복건, 강소, 절강에서 벌어진 여러 전쟁에서 소모된 직군은 장비와 물자가 모두 부족하여 사기가 크게 낮아졌다. 그리고 우페이푸와 연합한 [[천중밍]], [[양썬]] 등도 모두 패퇴하여 세력이 축소되었다. 즉 1924년 시점은 봉천군벌의 세력은 가장 강성해지고 직계군벌의 세력은 가장 취약해진 시점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